그렇다면 쿤달리니를 어떻게 각성해야 할 것이지가 관건이다. 쿤달리니 각성은 여러분의 무의식을 깨워야 가능하다. 무의식이란 인간의 의식 저 편에 잠재된 내면의 에너지이다. 융 박사는 이 무의식 에너지를 리비도라는 형태로 이야기하였다. 리비도 에너지는 보이지 않는 형상과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데, 한마디로 에너지 설계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에너지 설계도는 에너지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지능적으로 알고 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중에서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로 보면 된다. 무의식을 깨우기 위해서는 호흡수련, 쿤달리니 명상 그리고 각종 종교의 경전 탐독 등 정신세계 서적들을 읽는 것이다.
일단 쿤달리니가 자동 각성되면 결국 자동으로 수행이 이루어져 나간다. 새로운 의식과 행동 그리고 언어패턴들과 사유패턴들을 익히고 심지어 행동패턴까지도 익힌다. 쿤달리니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적 의식의 발현이다.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창조성을 그의 저서 《과정과 실재》에서 그렇게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것은 쿤달리니 요가나 쿤달리니 명상과 같이 인간에게 내재한 근원적 힘이며, 이 우주의 가장 원초적이고 시원(始原)적 힘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천재성과 창조성은 일맥상통한데, 그 둘의 근원은 바로 쿤달리니 에너지에 있다. 창조성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인데, 일반인들은 이러한 창조적 힘을 얻지를 못한다. 물론 수행자들도 호흡수련, 명상 등을 통해 쿤달리니를 각성한다고 하지만, 깊이 들어가서 보면 쿤달리니는 자신의 힘으로 각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신계 존재자들과 신(God)이 각성시켜 주는 특수한 에너지이다. 따라서 함부로 수행하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깔리 상태라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게 되고, 올바른 마음과 선업이 많은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하늘이 두르가 상태라는 지복 속에 살도록 해준다. 참고로 독사의 힘인 쿤달리니는 물질계에 추방된 영혼을 되찾음으로써 신성한 힘으로 재생시킨다. 이는 카발라(Kabbalah)의 생명의 나무에 부속된 10개의 세피라(Sephira)를 통과하여 상승하는 에너지 흐름과 유사하다.
샨스크리트어로 동굴 또는 코일을 뜻하는 쿤달리니 에너지는 용수철처럼 내재된 힘이다. 신선(神仙)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문양이 동심원인 것을 보면, 쿤달리니 에너지와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 어쨌든, 쿤달리니는 사유의 힘을 강화시키고 말이나 행동까지 힘을 갖도록 해준다. 쿤달리니는 힘(Power)이며 에너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쿤달리니를 함부로 쓰면 절대 안 된다. 악업을 만들기 때문이다. 바르게 사용하면 악업을 제거하거나 정화 및 소멸시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악업을 쌓는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진화에너지인 쿤달리니를 더 발달시키기 위해서 항상 남을 돕고 남에게 봉사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책을 많이 읽게 되어 있다. 책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고 자신의 정신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견고하게 한다. 좋은 책에는 정신을 강화시키는 약(藥)이 있기 때문에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책에서 약을 얻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쿤달리니 각성자가 책을 읽으면 보통사람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이해력이 높고 깊고 넓게 본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야가 넓어지고 깊이가 심오해진다.
쿤달리니는 전이(Transference)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고피 크리쉬나나 오쇼 라즈니쉬 그리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은 쿤달리니 각성자의 글이나 말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내면 쿤달리니가 깨어날 수 있다. 철이 자석에 가까이 있으면 자석의 기운을 띠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부정적 쿤달리니를 갖고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악업이 많아 잘못된 쿤달리니 각성을 지닌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쿤달리니 각성자도 고통스럽지만 주변사람도 약간이나마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서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를 구족하지 못한 수행자가 힘만 발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생각의 뒤얽힘이나 편협한 생각들은 잘못된 쿤달리니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항상 성현들의 경전이나 좋은 선지식의 정신세계 관련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유를 견실하고 정합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쿤달리니 각성자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냥 보통 책들을 많이 읽으면 오히려 자신의 두뇌와 몸에 갖추어진 쿤달리니 기문진(奇文陳)이 깨지거나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두뇌의 혼돈과 의식의 저하를 막기 위해서 반드시 좋은 서적을 읽어야 한다. 비논리적이고 부정확한 표현이나 잘못된 견처에서 쓰여진 책은 쿤달리니 각성자의 정신계에서 읽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즉 쿤달리니 각성자의 무의식을 그의 정신계에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제부터 신이 선택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쿤달리니와 미세신(Subtle Body)
아무튼 쿤달리니 각성자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사람보다 내면의 힘이 몇 배 더 강해지고 의지력이나 지구력도 강해진다. 특히 쿤달리니 각성자에게 많이 보여지는 현상은 열정이 굉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해진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매우 치밀하고 치열하게 한다. 쿤달리니의 본성은 에너지 활용을 잘 하는데 있기 때문에, 쿤달리니 각성자는 삶을 통해서 에너지 분배를 잘 하게 된다.
그리고 미세신(微細神:Subtle Body)이라고 하는 인체의 에너지시스템을 깨어나게 하고 활성화시키므로 4대 영혼체들이 모두 활성화되고 힘을 얻는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4대 영혼체(에텔, 아스트럴, 멘털, 코절체)가 모두 강력한 파워를 지니게 된다. 사실 유체이탈(The Out of Body), 아스트럴 투사(Astral Projection), 자각몽(Lucid Dream) 그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Enlightenment)까지도 쿤달리니의 영향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쿤달리니는 4대 영체가 존재하는 에너지 시스템의 기틀이다. 마치 빈 그릇과도 같은 것이 쿤달리니이다. 빈 그릇에는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이 바로 쿤달리니라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하면 쿤달리니는 바로 쓰임(用)을 의미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4대 영체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바로 쿤달리니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 4대 영혼체인 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코절체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쿤달리니 에너지이다. 물론 쿤달리니가 각성되지 않은 사람은 인체의 저급 생명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반대로 인체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잠재적 생명에너지를 사용한다. 한마디로 쿤달리니는 고급에너지인 것이다. 차에 들어가는 고급 휘발유와 값싼 기름의 차이와 같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현된 사람의 경우 4대 영체가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고급에너지를 사용할 경우 고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쿤달리니를 각성하고자 많은 수행자는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체시스템이 그랜저가 아니라 싸구려 오토바이인데 잘못해서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너무 고급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인체시스템도 좋고 에너지도 좋아야 한다.
인체시스템을 바꾸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나쁜 사람한테 많이 시달려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고 면역력이 생겨야 한다. 감성적으로 좋은 정서와 음악, 예술, 풍경, 자연경관 등을 통해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며, 책이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 지성체인 멘탈체를 연마하고 좋은 보시, 사랑, 봉사, 헌신 등을 통해 신성체인 코절체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4대 영체에 대한 견고하고 정화된 시스템을 구비했을 때 쿤달리니가 의미를 갖는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쿤달리니가 열리기도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쿤달리니를 각성하려면 선업을 많이 쌓아야 훌륭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얻게 된다. 물론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인체 에너지 시스템을 환골탈태시키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인체시스템과 쿤달리니 에너지는 상호작용을 한다. 쿤달리니는 인체시스템에 있는 버그와 오류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인체시스템에서 쿤달리니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계속해서 말이다.
쿤달리니와 악업의 정화 및 소멸
일반 사람이 쿤달리니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4대 영체를 골고루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선업을 많이 쌓아야 한다. 무주상(머무른 바 없는 마음)으로 보시와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세계가 심오한 상위 정신계에 진입한 수행자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가피와 은총을 받는다.
혹자들은 황홀한 에너지가 쿤달리니라고 이해하는데, 실제로 그것만은 아니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강인한 에너지로서 사랑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성자(聖者)의 반열에 올라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골방에 틀어 앉아 명상과 호흡수련만 한다고 해서 쿤달리니가 각성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마음가짐 한 번 잘 쓰면 다시 말해서 좋은 생각을 잘하면 그것이 바로 쿤달리니 각성이나 발현의 시작이다. 신(God)께서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주는 이유는 바로 그 에너지를 잘 쓸 수 있는 적합자이기 때문에 해당 수행자의 의식을 쿤달리니 에너지로 채워주는 것이다.
진리(Truth)의 에너지요 진화의 에너지인 쿤달리니는 마치 촛불에 기름을 붙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잘못하면 마치 화재가 발생한 것처럼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는 순간에는 고통과 악업까지 터져 나오므로 무조건 쿤달리니 각성을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쿤달리니가 일단 각성되면 성욕을 주의해야 한다. 성욕은 독의 에너지이므로 쿤달리니 에너지와 결합되면 치명적 손상을 가져다 준다. 인체 시스템이 깨진다는 것이다. 고장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쿤달리니 각성자는 항상 신(God)의 은총과 축복을 위해 감사와 기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사용하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쿤달리니 대폭발을 경험한 어느 수행자께서 이르시길 쿤달리니의 핵심은 바로 악업 청산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중생들에게 빚진 우주적인 빚을 모두 갚을 때 우주공간계를 뚫고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쿤달리니는 진화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일단 각성되면 정신계의 동지와 경쟁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따라서 잘 대처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나는 쿤달리니가 각성된 후 붓다의 경전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함경이 특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매우 좋은 에너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서적이나 경전보다 아함경으로부터 좋은 의식을 얻었다.
또한 쿤달리니는 우주에너지이다. 지구의 자장권을 벗어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매우 강력한 에너지이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쿤달리니가 좋지 않은 작용을 일으킨다. 우주의 진화와 전체 우주종족들의 진화를 위해서 신(God:극초절정 절대고수)께서 점지하고 선택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특권의 에너지가 바로 쿤달리니 에너지인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기 위해서는 순수해야 한다.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철학자들의 쿤달리니 시스템을 미세신(Subtle Body) 차원에서 읽기 위한 것이 하나요, 둘은 그들이 숨겨놓은 미래의 에너지시스템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들의 미세신 구조가 현저하게 치밀하고 세밀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지성은 몸과 결부되어 있고 인체시스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 언급한 것처럼 지성체를 포함한 4대 영혼체가 모두 인체시스템과 결부된다. 아무튼, 철학자들의 지성체를 들여다보고 연구하면 매우 치밀하고 세밀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쿤달리니 각성자는 알 수 있다. 쿤달리니 각성자는 그들이 남긴 에너지 체제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 에너지 체계를 재구성하고 재형성화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미래 쿤달리니 진화 방향을 다른 과거 선인(先人)들인 철학자들로부터 얻는다는 것이다. 바하나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곡을 통해서도 감성체를 깨어나게 할 수 있고, 현대음악을 들으면서도 감성체를 깨어나게 할 수도 있다.
에텔체는 순수한 정의와 의지의 에너지이다. 어떤 신선이 제자에게 정으로 선물을 주었다는 것처럼, 순수한 정은 에텔체 또는 에텔더블체인 감정체를 깨어나게 하는 데 활용된다. 전체적으로 4대 영혼체가 개화(開化)되고 꽃피우고 각성되면 차크라(Chakra) 시스템의 업그레이드와 동시에 미세신까지도 고급화된다. 미세신은 한 마디로 나디(Nadi:인체의 기경맥:氣經脈)들이 지나가는 미세한 보이지 않는 몸을 말한다. 이 투명한 바디가 발달되어야 바로 견성(見性)을 하게 되는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이 투명한 바디, 즉 미세신을 정화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쿤달리니 에너지 말고도 엠브로지아(Ambrosia)라고 하는 희열의 약(藥)에 해당하는 고급에너지가 있는데, 흔히 도가(道家)에서는 감로(甘露)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인체 시스템은 4대 영혼체 그리고 미세신 더 나아가 차크라 그리고 나디(Nadi) 여기에 어떤 에너지를 투여하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의 힘과 기능성이 결정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직관력, 내구성, 힘 모든 면에서 인체시스템이 업그레이드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쿤달리니와 순수성
고도의 동양철학인 주역(周易)은 바로 기문진으로서 미세신을 활성화하고 치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쿤달리니가 깨어난 사람이 주역을 공부하게 되면 훨씬 더 강력한 이해와 파악을 하게 된다. 주역 자체가 쿤달리니를 깨우기도 한다. 주역의 효사(爻辭) 해설을 보면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 그리고 땅의 도리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해야 하는지 수행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정화와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것이다. 특히 주역의 글 전체는 바로 순수성을 지향한다. 쿤달리니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발현하는 것이라면 주역 구절의 순수성은 쿤달리니 각성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추가로 견성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음계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체시스템을 저하시키거나 퇴화시키고 생명 에너지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쿤달리니 수행자는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 쿤달리니 각성을 얻었던 고피 크리쉬나는 아마도 쿤달리니 각성 후 성욕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보낸 것으로 회자된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하지만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은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생각하는 자가 없이 허공 속에서 생각이 조용히 일어나 조용히 허공 속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허공과 생각은 일여(一如)이다. 마치 바다와 파도가 모양만 다르지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자신의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 즉, 한 올의 생각이 매우 큰 망상까지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두렵게 하고 대인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람들을 무섭게 여기고 죄의식을 갖고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두려움이 만병과 불안 그리고 고통의 근원이란 말이 있다. 물론 일반 중생들은 너무나 오욕의 에너지에 물들어 있어 이러한 죄의식조차도 망각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순수한 마음으로 구도하는 분들은 매우 좋은 마음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 그 마음의 빛을 찾으면 누구나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렵고 어려운 길을 인내하고 통과해야 한다. 여하튼, 중생들에게 있어서 생각들이라는 것은 잡음이요 불협화음이요 불순물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무작정 나쁜 생각, 잘못된 생각, 지저분한 생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중생심과 청정심이 섞여 의식에 갈마들어있기 때문에 분간이 안 될 뿐 엄연히 청정한 마음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렇게 고요하고 침착하고 맑고 밝게 차분히 존재하는 청정심을 깨워내는 것이 수행의 요체요 비결인 것이다.
쿤달리니 발현과 현현 양태
한편 생각에도 패턴이 있는데, 쿤달리니(Kundalini) 요가에서는 그 다양성을 매우 중시한다. 사실, 신(God)은 자신의 자손들을 낳은 후 인내하고 슬기롭고 용기있고 자비와 사랑을 겸비한 준수한 자손을 기르려는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진실로 아름답게 살 필요가 있는데, 그 아름다움의 덕목 중에서 쿤달리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인류의 고대문명에서 현대문화에 이르기까지 쿤달리니가 아니 숨쉬고 있는 곳은 없다 하겠다. 고대사원의 문양에서부터 건축 조형물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쿤달리니다. 물론 이는 쿤달리니의 간접적인 표현이며 직접적인 표현은 모두(冒頭)에서 밝힌 바와 같이 뱀과 같은 동물이나 용과 같은 신비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히포크라테스의 지팡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쿤달리니가 펼치는 사사물물의 양상과 사유(思惟)의 패턴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쿤달리니는 의식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의 구체적 현현방식은 생각의 패턴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생각의 패턴은 덧없는 경우가 많으나, 쿤달리니는 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각인(刻印)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만다라(Mandala) 또한 쿤달리니의 일종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쿤달리니는 강력하다. 타트바(물질 형성소)를 나타내는 도형이 사각형, 초승달 모양, 삼각형, 다윗의 별(솔로몬의 인장)모양 그리고 원 하나하나가 쿤달리니의 현현 양태이다.
그리고 쿤달리니는 인체의 하부의식에 잠재된 에너지, 샥티 에너지를 본원으로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두뇌의 의식과는 달리 몸의 의식이요 몸의 힘에서 비롯된다. 리차드 바크의《갈매기의 꿈》에서 죠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깨우친 것처럼 몸은 생각들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표현이다. 의식은 그러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마당일 뿐이다. 생각은 어디서 발원되는가 하면 바로 인간의 4대 영체(에텔더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와 차크라 센터에서 비롯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은 잠재의식을 말하며, 이는 쿤달리니 요가에서 말하는 하위 차크라들, 즉 물라드하라, 스와디히스타나, 마니퓨라, 아나하타, 비슈디 차크라들에 해당한다. 그리고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의식 너머에 있는 것으로, 주로 코절체나 아즈나 차크라 그리고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해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무의식이 잠재의식이든 초의식이든 간에 그것은 바로 인간의 미세신(微細身)과 연관되어 있다. 이 미세신은 Subtle Body라고 하여 인간의 기(프라나)와 호흡이 소통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미세신에 기문진(奇文陳)이 새겨진다. 그리고 이 미세신이 정화되어 맑고 깨끗해질 때 황홀한 의식이 들어온다. 우리가 수련하다가 가끔씩 몸 속에서 상쾌하고 쾌활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전생과 현생의 악업이 정화되는 동시에 기가 나디(Nadi)를 뚫고 제대로 타동되는 것을 말해준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미세신을 타고 미세한 쿤달리니가 움직인다. 그래서 그들의 사유를 보면 매우 부드럽고 정교하며 정묘(精妙)하다. 실제로 도가(道家) 스승이 쓴 글을 읽을 때면 글 모양이 매우 둥글둥글하고 유강(柔强)한 문체를 정신 깊이 느낄 수 있어 의식각성과 영적 각성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쿤달리니가 크게 발달한 사람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어보면 읽거나 듣는 이의 의식체계도 매우 유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변형적 힘을 얻게 된다. 실제로 쿤달리니 각성자의 번역글이나 연설 그리고 강좌를 들어보면 매우 강한 영적이면서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엷게나마 느끼기도 한다. 물론 깊은 몰입에 들어가면 쿤달리니가 소쿤달리니적인 의식각성(환희와 즐거움)이 아니라 대쿤달리니적인 의식확장(심오함과 광대함)을 느끼거나 누리게 된다.
쿤달리니 각성과 수행법
소쿤달리니는 생각의 패턴으로 발생하고 현현한다. 그러나 대쿤달리니는 영혼의 확장이다. 그래서 생각의 패턴을 넘어선 영혼의 울림과 떨림 더 나아가 영혼의 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소쿤달리니가 대쿤달리니를 위한 부수적이고 보완적인, 별로 쓸모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쿤달리니가 발현되어야 대쿤달리니가 활발히 작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쿤달리니가 맑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대쿤달리니도 우주적인 의식으로 생동감 있게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흔히 대쿤달리니를 얻으려면 우주적인 의식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쿤달리니가 각성되어도 훌륭한 문장가나 문필가(예를 들어, 도올 김용옥 선생)가 된다.
하지만 수행자가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쿤달리니 각성은 필수적이다. 대쿤달리니 각성을 위한 수련법을 석가모니 붓다의 밀교에서 주로 전수되어 내려와 밀라래빠와 같은 성자가 체득하였다. 인도 쿤달리니 요가나 티벳 밀교나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비슷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즈나 차크라부터 깨어나가는 하향식(Top-Down) 방식과 물라드하라 차크라나 마니퓨라 차크라부터 깨어나가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출간된 몇몇 서적에서는 쿤달리니 요가와 티벳 밀교 간의 수행법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실제로 쿤달리니 요가를 각성시킬 때 주로 호흡수련을 사용한다. 즉 마니퓨라 차크라를 각성시켜 그 에너지를 물라드하라 차크라가 위치한 꼬리뼈 부근으로 옮겨가 그 꼬리뼈를 활성화시켜 그곳에 잠재된 에너지를 척추를 타고 상승운행시켜 아즈나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방법이다. 물론 도가(道家)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있어 선도내공의 오룡봉성(五龍捧聖) 과정(대약과정)과 함께 동시에 쿤달리니가 일어난 것으로 안다. 또한 휘황찬란한 백색과 적색의 여러 구술들이 배 안에서 운행되면서 일월합벽이 일어나고 그것이 아나하타 차크라를 뚫고 아즈나 차크라를 뚫은 후 사하스라라 차크라(두정:백회)를 뚫고 밖으로 분출하여 쿤달리니 폭발과 같은 형태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도가에서는 주후비금강의라고 말한다고 전한다.
인도 요가의 고대 비전서에는 쿤달리니 요가의 핵심이 메두하나디 시스템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척주를 타고 올라가는 뜨거운 열기운과 차가운 냉기운 둘이 아즈나 차크라에서 합일되어 빛의 성자를 보았다고 전한다. 고피 크리슈나와 오쇼 라즈니쉬 모두 서로 다른 쿤달리니 현상과 체험을 경험하였다.
쿤달리니가 잘못 각성되면 성 에너지에 의해서 문제가 된다. 즉, 완전하게 소화되지 못한 쿤달리니 폭발, 즉 불완전하며 불안정한 쿤달리니 폭발은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장작더미와 같다. 아쉬운 느낌을 갖게 되고 일말의 미련을 갖게 된다. 뒷간에 갔다가 변을 다 못보고 나오는 것과 같은 기분인 것이다. 이 때문에 쿤달리니 각성을 내면에서 추구하며 이러한 황홀감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른 방편에 손을 대기도 한다. 도박이나 다양한 이성간의 성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전생과 현업의 선업이 많을 경우에는 쿤달리니 대폭발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비록 음란한 짓을 많이 해도 법망에 걸리지 않으며 언젠가는 정상궤도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연금술에서는 이를 “선자(Good Man)가 선한 마음(도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쁜 과정을 겪어도(수행을 잘못하여 외도로 빠져도) 결국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만 “악인(Bad Man)이 악한 마음(잘못된 사욕)으로 좋은 과정을 겪어도(수행을 잘해도)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래서 불가(佛家)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음이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99명을 살생한 앙굴라마라도 죄의 늪에서 벗어나 붓다의 품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앙굴라마라는 도를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르고 죽였기 때문에 죄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어느 창녀를 놓고 죄없는 자는 저 여자를 쳐라라고 하였을때 그녀는 이미 쿤달리니 체험을 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으며, 많은 선지식들이 방탕하게 사는 것도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와 결부되어 기존 정도(正道)로서의 수행관에 대한 심대한 파괴와 붕괴를 불러오는 시대적 사조(思潮)이며 역사적 시운(時運)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자신의 아쉬람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에이즈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은 그가 탄트라를 잘못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게 한다.
일단 쿤달리니가 자동 각성되면 결국 자동으로 수행이 이루어져 나간다. 새로운 의식과 행동 그리고 언어패턴들과 사유패턴들을 익히고 심지어 행동패턴까지도 익힌다. 쿤달리니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적 의식의 발현이다.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창조성을 그의 저서 《과정과 실재》에서 그렇게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것은 쿤달리니 요가나 쿤달리니 명상과 같이 인간에게 내재한 근원적 힘이며, 이 우주의 가장 원초적이고 시원(始原)적 힘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천재성과 창조성은 일맥상통한데, 그 둘의 근원은 바로 쿤달리니 에너지에 있다. 창조성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인데, 일반인들은 이러한 창조적 힘을 얻지를 못한다. 물론 수행자들도 호흡수련, 명상 등을 통해 쿤달리니를 각성한다고 하지만, 깊이 들어가서 보면 쿤달리니는 자신의 힘으로 각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신계 존재자들과 신(God)이 각성시켜 주는 특수한 에너지이다. 따라서 함부로 수행하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깔리 상태라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게 되고, 올바른 마음과 선업이 많은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하늘이 두르가 상태라는 지복 속에 살도록 해준다. 참고로 독사의 힘인 쿤달리니는 물질계에 추방된 영혼을 되찾음으로써 신성한 힘으로 재생시킨다. 이는 카발라(Kabbalah)의 생명의 나무에 부속된 10개의 세피라(Sephira)를 통과하여 상승하는 에너지 흐름과 유사하다.
샨스크리트어로 동굴 또는 코일을 뜻하는 쿤달리니 에너지는 용수철처럼 내재된 힘이다. 신선(神仙)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문양이 동심원인 것을 보면, 쿤달리니 에너지와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 어쨌든, 쿤달리니는 사유의 힘을 강화시키고 말이나 행동까지 힘을 갖도록 해준다. 쿤달리니는 힘(Power)이며 에너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쿤달리니를 함부로 쓰면 절대 안 된다. 악업을 만들기 때문이다. 바르게 사용하면 악업을 제거하거나 정화 및 소멸시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악업을 쌓는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진화에너지인 쿤달리니를 더 발달시키기 위해서 항상 남을 돕고 남에게 봉사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책을 많이 읽게 되어 있다. 책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고 자신의 정신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견고하게 한다. 좋은 책에는 정신을 강화시키는 약(藥)이 있기 때문에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책에서 약을 얻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쿤달리니 각성자가 책을 읽으면 보통사람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이해력이 높고 깊고 넓게 본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야가 넓어지고 깊이가 심오해진다.
쿤달리니는 전이(Transference)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고피 크리쉬나나 오쇼 라즈니쉬 그리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은 쿤달리니 각성자의 글이나 말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내면 쿤달리니가 깨어날 수 있다. 철이 자석에 가까이 있으면 자석의 기운을 띠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부정적 쿤달리니를 갖고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악업이 많아 잘못된 쿤달리니 각성을 지닌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쿤달리니 각성자도 고통스럽지만 주변사람도 약간이나마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서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를 구족하지 못한 수행자가 힘만 발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생각의 뒤얽힘이나 편협한 생각들은 잘못된 쿤달리니 부작용을 낳는다. 그래서 항상 성현들의 경전이나 좋은 선지식의 정신세계 관련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유를 견실하고 정합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쿤달리니 각성자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냥 보통 책들을 많이 읽으면 오히려 자신의 두뇌와 몸에 갖추어진 쿤달리니 기문진(奇文陳)이 깨지거나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두뇌의 혼돈과 의식의 저하를 막기 위해서 반드시 좋은 서적을 읽어야 한다. 비논리적이고 부정확한 표현이나 잘못된 견처에서 쓰여진 책은 쿤달리니 각성자의 정신계에서 읽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즉 쿤달리니 각성자의 무의식을 그의 정신계에서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제부터 신이 선택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쿤달리니와 미세신(Subtle Body)
아무튼 쿤달리니 각성자는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통사람보다 내면의 힘이 몇 배 더 강해지고 의지력이나 지구력도 강해진다. 특히 쿤달리니 각성자에게 많이 보여지는 현상은 열정이 굉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해진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매우 치밀하고 치열하게 한다. 쿤달리니의 본성은 에너지 활용을 잘 하는데 있기 때문에, 쿤달리니 각성자는 삶을 통해서 에너지 분배를 잘 하게 된다.
그리고 미세신(微細神:Subtle Body)이라고 하는 인체의 에너지시스템을 깨어나게 하고 활성화시키므로 4대 영혼체들이 모두 활성화되고 힘을 얻는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4대 영혼체(에텔, 아스트럴, 멘털, 코절체)가 모두 강력한 파워를 지니게 된다. 사실 유체이탈(The Out of Body), 아스트럴 투사(Astral Projection), 자각몽(Lucid Dream) 그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Enlightenment)까지도 쿤달리니의 영향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쿤달리니는 4대 영체가 존재하는 에너지 시스템의 기틀이다. 마치 빈 그릇과도 같은 것이 쿤달리니이다. 빈 그릇에는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이 바로 쿤달리니라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하면 쿤달리니는 바로 쓰임(用)을 의미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4대 영체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바로 쿤달리니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 4대 영혼체인 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코절체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쿤달리니 에너지이다. 물론 쿤달리니가 각성되지 않은 사람은 인체의 저급 생명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반대로 인체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잠재적 생명에너지를 사용한다. 한마디로 쿤달리니는 고급에너지인 것이다. 차에 들어가는 고급 휘발유와 값싼 기름의 차이와 같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현된 사람의 경우 4대 영체가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고급에너지를 사용할 경우 고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쿤달리니를 각성하고자 많은 수행자는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체시스템이 그랜저가 아니라 싸구려 오토바이인데 잘못해서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너무 고급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인체시스템도 좋고 에너지도 좋아야 한다.
인체시스템을 바꾸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나쁜 사람한테 많이 시달려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고 면역력이 생겨야 한다. 감성적으로 좋은 정서와 음악, 예술, 풍경, 자연경관 등을 통해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며, 책이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 지성체인 멘탈체를 연마하고 좋은 보시, 사랑, 봉사, 헌신 등을 통해 신성체인 코절체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4대 영체에 대한 견고하고 정화된 시스템을 구비했을 때 쿤달리니가 의미를 갖는다.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쿤달리니가 열리기도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쿤달리니를 각성하려면 선업을 많이 쌓아야 훌륭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얻게 된다. 물론 쿤달리니가 각성되어 인체 에너지 시스템을 환골탈태시키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인체시스템과 쿤달리니 에너지는 상호작용을 한다. 쿤달리니는 인체시스템에 있는 버그와 오류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인체시스템에서 쿤달리니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계속해서 말이다.
쿤달리니와 악업의 정화 및 소멸
일반 사람이 쿤달리니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4대 영체를 골고루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선업을 많이 쌓아야 한다. 무주상(머무른 바 없는 마음)으로 보시와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세계가 심오한 상위 정신계에 진입한 수행자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가피와 은총을 받는다.
혹자들은 황홀한 에너지가 쿤달리니라고 이해하는데, 실제로 그것만은 아니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강인한 에너지로서 사랑과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성자(聖者)의 반열에 올라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골방에 틀어 앉아 명상과 호흡수련만 한다고 해서 쿤달리니가 각성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마음가짐 한 번 잘 쓰면 다시 말해서 좋은 생각을 잘하면 그것이 바로 쿤달리니 각성이나 발현의 시작이다. 신(God)께서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주는 이유는 바로 그 에너지를 잘 쓸 수 있는 적합자이기 때문에 해당 수행자의 의식을 쿤달리니 에너지로 채워주는 것이다.
진리(Truth)의 에너지요 진화의 에너지인 쿤달리니는 마치 촛불에 기름을 붙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잘못하면 마치 화재가 발생한 것처럼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는 순간에는 고통과 악업까지 터져 나오므로 무조건 쿤달리니 각성을 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쿤달리니가 일단 각성되면 성욕을 주의해야 한다. 성욕은 독의 에너지이므로 쿤달리니 에너지와 결합되면 치명적 손상을 가져다 준다. 인체 시스템이 깨진다는 것이다. 고장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쿤달리니 각성자는 항상 신(God)의 은총과 축복을 위해 감사와 기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사용하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쿤달리니 대폭발을 경험한 어느 수행자께서 이르시길 쿤달리니의 핵심은 바로 악업 청산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중생들에게 빚진 우주적인 빚을 모두 갚을 때 우주공간계를 뚫고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쿤달리니는 진화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일단 각성되면 정신계의 동지와 경쟁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따라서 잘 대처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나는 쿤달리니가 각성된 후 붓다의 경전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함경이 특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매우 좋은 에너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서적이나 경전보다 아함경으로부터 좋은 의식을 얻었다.
또한 쿤달리니는 우주에너지이다. 지구의 자장권을 벗어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매우 강력한 에너지이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쿤달리니가 좋지 않은 작용을 일으킨다. 우주의 진화와 전체 우주종족들의 진화를 위해서 신(God:극초절정 절대고수)께서 점지하고 선택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특권의 에너지가 바로 쿤달리니 에너지인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기 위해서는 순수해야 한다.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철학자들의 쿤달리니 시스템을 미세신(Subtle Body) 차원에서 읽기 위한 것이 하나요, 둘은 그들이 숨겨놓은 미래의 에너지시스템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들의 미세신 구조가 현저하게 치밀하고 세밀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지성은 몸과 결부되어 있고 인체시스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 언급한 것처럼 지성체를 포함한 4대 영혼체가 모두 인체시스템과 결부된다. 아무튼, 철학자들의 지성체를 들여다보고 연구하면 매우 치밀하고 세밀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쿤달리니 각성자는 알 수 있다. 쿤달리니 각성자는 그들이 남긴 에너지 체제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 에너지 체계를 재구성하고 재형성화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미래 쿤달리니 진화 방향을 다른 과거 선인(先人)들인 철학자들로부터 얻는다는 것이다. 바하나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곡을 통해서도 감성체를 깨어나게 할 수 있고, 현대음악을 들으면서도 감성체를 깨어나게 할 수도 있다.
에텔체는 순수한 정의와 의지의 에너지이다. 어떤 신선이 제자에게 정으로 선물을 주었다는 것처럼, 순수한 정은 에텔체 또는 에텔더블체인 감정체를 깨어나게 하는 데 활용된다. 전체적으로 4대 영혼체가 개화(開化)되고 꽃피우고 각성되면 차크라(Chakra) 시스템의 업그레이드와 동시에 미세신까지도 고급화된다. 미세신은 한 마디로 나디(Nadi:인체의 기경맥:氣經脈)들이 지나가는 미세한 보이지 않는 몸을 말한다. 이 투명한 바디가 발달되어야 바로 견성(見性)을 하게 되는 것이다. 쿤달리니 에너지는 이 투명한 바디, 즉 미세신을 정화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쿤달리니 에너지 말고도 엠브로지아(Ambrosia)라고 하는 희열의 약(藥)에 해당하는 고급에너지가 있는데, 흔히 도가(道家)에서는 감로(甘露)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인체 시스템은 4대 영혼체 그리고 미세신 더 나아가 차크라 그리고 나디(Nadi) 여기에 어떤 에너지를 투여하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의 힘과 기능성이 결정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직관력, 내구성, 힘 모든 면에서 인체시스템이 업그레이드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쿤달리니와 순수성
고도의 동양철학인 주역(周易)은 바로 기문진으로서 미세신을 활성화하고 치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쿤달리니가 깨어난 사람이 주역을 공부하게 되면 훨씬 더 강력한 이해와 파악을 하게 된다. 주역 자체가 쿤달리니를 깨우기도 한다. 주역의 효사(爻辭) 해설을 보면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 그리고 땅의 도리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해야 하는지 수행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정화와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것이다. 특히 주역의 글 전체는 바로 순수성을 지향한다. 쿤달리니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발현하는 것이라면 주역 구절의 순수성은 쿤달리니 각성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추가로 견성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음계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체시스템을 저하시키거나 퇴화시키고 생명 에너지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쿤달리니 수행자는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 쿤달리니 각성을 얻었던 고피 크리쉬나는 아마도 쿤달리니 각성 후 성욕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보낸 것으로 회자된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하지만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은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생각하는 자가 없이 허공 속에서 생각이 조용히 일어나 조용히 허공 속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허공과 생각은 일여(一如)이다. 마치 바다와 파도가 모양만 다르지 하나인 것과 같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자신의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 즉, 한 올의 생각이 매우 큰 망상까지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두렵게 하고 대인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람들을 무섭게 여기고 죄의식을 갖고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두려움이 만병과 불안 그리고 고통의 근원이란 말이 있다. 물론 일반 중생들은 너무나 오욕의 에너지에 물들어 있어 이러한 죄의식조차도 망각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순수한 마음으로 구도하는 분들은 매우 좋은 마음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 그 마음의 빛을 찾으면 누구나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렵고 어려운 길을 인내하고 통과해야 한다. 여하튼, 중생들에게 있어서 생각들이라는 것은 잡음이요 불협화음이요 불순물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무작정 나쁜 생각, 잘못된 생각, 지저분한 생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중생심과 청정심이 섞여 의식에 갈마들어있기 때문에 분간이 안 될 뿐 엄연히 청정한 마음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렇게 고요하고 침착하고 맑고 밝게 차분히 존재하는 청정심을 깨워내는 것이 수행의 요체요 비결인 것이다.
쿤달리니 발현과 현현 양태
한편 생각에도 패턴이 있는데, 쿤달리니(Kundalini) 요가에서는 그 다양성을 매우 중시한다. 사실, 신(God)은 자신의 자손들을 낳은 후 인내하고 슬기롭고 용기있고 자비와 사랑을 겸비한 준수한 자손을 기르려는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진실로 아름답게 살 필요가 있는데, 그 아름다움의 덕목 중에서 쿤달리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인류의 고대문명에서 현대문화에 이르기까지 쿤달리니가 아니 숨쉬고 있는 곳은 없다 하겠다. 고대사원의 문양에서부터 건축 조형물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쿤달리니다. 물론 이는 쿤달리니의 간접적인 표현이며 직접적인 표현은 모두(冒頭)에서 밝힌 바와 같이 뱀과 같은 동물이나 용과 같은 신비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히포크라테스의 지팡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쿤달리니가 펼치는 사사물물의 양상과 사유(思惟)의 패턴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쿤달리니는 의식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의 구체적 현현방식은 생각의 패턴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생각의 패턴은 덧없는 경우가 많으나, 쿤달리니는 의식과 무의식의 깊은 각인(刻印)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만다라(Mandala) 또한 쿤달리니의 일종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쿤달리니는 강력하다. 타트바(물질 형성소)를 나타내는 도형이 사각형, 초승달 모양, 삼각형, 다윗의 별(솔로몬의 인장)모양 그리고 원 하나하나가 쿤달리니의 현현 양태이다.
그리고 쿤달리니는 인체의 하부의식에 잠재된 에너지, 샥티 에너지를 본원으로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두뇌의 의식과는 달리 몸의 의식이요 몸의 힘에서 비롯된다. 리차드 바크의《갈매기의 꿈》에서 죠나단 리빙스턴 시걸이 깨우친 것처럼 몸은 생각들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표현이다. 의식은 그러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마당일 뿐이다. 생각은 어디서 발원되는가 하면 바로 인간의 4대 영체(에텔더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와 차크라 센터에서 비롯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은 잠재의식을 말하며, 이는 쿤달리니 요가에서 말하는 하위 차크라들, 즉 물라드하라, 스와디히스타나, 마니퓨라, 아나하타, 비슈디 차크라들에 해당한다. 그리고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의식 너머에 있는 것으로, 주로 코절체나 아즈나 차크라 그리고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해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무의식이 잠재의식이든 초의식이든 간에 그것은 바로 인간의 미세신(微細身)과 연관되어 있다. 이 미세신은 Subtle Body라고 하여 인간의 기(프라나)와 호흡이 소통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미세신에 기문진(奇文陳)이 새겨진다. 그리고 이 미세신이 정화되어 맑고 깨끗해질 때 황홀한 의식이 들어온다. 우리가 수련하다가 가끔씩 몸 속에서 상쾌하고 쾌활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전생과 현생의 악업이 정화되는 동시에 기가 나디(Nadi)를 뚫고 제대로 타동되는 것을 말해준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사람은 미세신을 타고 미세한 쿤달리니가 움직인다. 그래서 그들의 사유를 보면 매우 부드럽고 정교하며 정묘(精妙)하다. 실제로 도가(道家) 스승이 쓴 글을 읽을 때면 글 모양이 매우 둥글둥글하고 유강(柔强)한 문체를 정신 깊이 느낄 수 있어 의식각성과 영적 각성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쿤달리니가 크게 발달한 사람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어보면 읽거나 듣는 이의 의식체계도 매우 유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변형적 힘을 얻게 된다. 실제로 쿤달리니 각성자의 번역글이나 연설 그리고 강좌를 들어보면 매우 강한 영적이면서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엷게나마 느끼기도 한다. 물론 깊은 몰입에 들어가면 쿤달리니가 소쿤달리니적인 의식각성(환희와 즐거움)이 아니라 대쿤달리니적인 의식확장(심오함과 광대함)을 느끼거나 누리게 된다.
쿤달리니 각성과 수행법
소쿤달리니는 생각의 패턴으로 발생하고 현현한다. 그러나 대쿤달리니는 영혼의 확장이다. 그래서 생각의 패턴을 넘어선 영혼의 울림과 떨림 더 나아가 영혼의 꽃이 피어나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소쿤달리니가 대쿤달리니를 위한 부수적이고 보완적인, 별로 쓸모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쿤달리니가 발현되어야 대쿤달리니가 활발히 작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쿤달리니가 맑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대쿤달리니도 우주적인 의식으로 생동감 있게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흔히 대쿤달리니를 얻으려면 우주적인 의식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쿤달리니가 각성되어도 훌륭한 문장가나 문필가(예를 들어, 도올 김용옥 선생)가 된다.
하지만 수행자가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쿤달리니 각성은 필수적이다. 대쿤달리니 각성을 위한 수련법을 석가모니 붓다의 밀교에서 주로 전수되어 내려와 밀라래빠와 같은 성자가 체득하였다. 인도 쿤달리니 요가나 티벳 밀교나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비슷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즈나 차크라부터 깨어나가는 하향식(Top-Down) 방식과 물라드하라 차크라나 마니퓨라 차크라부터 깨어나가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출간된 몇몇 서적에서는 쿤달리니 요가와 티벳 밀교 간의 수행법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실제로 쿤달리니 요가를 각성시킬 때 주로 호흡수련을 사용한다. 즉 마니퓨라 차크라를 각성시켜 그 에너지를 물라드하라 차크라가 위치한 꼬리뼈 부근으로 옮겨가 그 꼬리뼈를 활성화시켜 그곳에 잠재된 에너지를 척추를 타고 상승운행시켜 아즈나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방법이다. 물론 도가(道家)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있어 선도내공의 오룡봉성(五龍捧聖) 과정(대약과정)과 함께 동시에 쿤달리니가 일어난 것으로 안다. 또한 휘황찬란한 백색과 적색의 여러 구술들이 배 안에서 운행되면서 일월합벽이 일어나고 그것이 아나하타 차크라를 뚫고 아즈나 차크라를 뚫은 후 사하스라라 차크라(두정:백회)를 뚫고 밖으로 분출하여 쿤달리니 폭발과 같은 형태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도가에서는 주후비금강의라고 말한다고 전한다.
인도 요가의 고대 비전서에는 쿤달리니 요가의 핵심이 메두하나디 시스템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척주를 타고 올라가는 뜨거운 열기운과 차가운 냉기운 둘이 아즈나 차크라에서 합일되어 빛의 성자를 보았다고 전한다. 고피 크리슈나와 오쇼 라즈니쉬 모두 서로 다른 쿤달리니 현상과 체험을 경험하였다.
쿤달리니가 잘못 각성되면 성 에너지에 의해서 문제가 된다. 즉, 완전하게 소화되지 못한 쿤달리니 폭발, 즉 불완전하며 불안정한 쿤달리니 폭발은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장작더미와 같다. 아쉬운 느낌을 갖게 되고 일말의 미련을 갖게 된다. 뒷간에 갔다가 변을 다 못보고 나오는 것과 같은 기분인 것이다. 이 때문에 쿤달리니 각성을 내면에서 추구하며 이러한 황홀감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른 방편에 손을 대기도 한다. 도박이나 다양한 이성간의 성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전생과 현업의 선업이 많을 경우에는 쿤달리니 대폭발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비록 음란한 짓을 많이 해도 법망에 걸리지 않으며 언젠가는 정상궤도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연금술에서는 이를 “선자(Good Man)가 선한 마음(도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쁜 과정을 겪어도(수행을 잘못하여 외도로 빠져도) 결국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만 “악인(Bad Man)이 악한 마음(잘못된 사욕)으로 좋은 과정을 겪어도(수행을 잘해도)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래서 불가(佛家)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음이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99명을 살생한 앙굴라마라도 죄의 늪에서 벗어나 붓다의 품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앙굴라마라는 도를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르고 죽였기 때문에 죄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어느 창녀를 놓고 죄없는 자는 저 여자를 쳐라라고 하였을때 그녀는 이미 쿤달리니 체험을 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으며, 많은 선지식들이 방탕하게 사는 것도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와 결부되어 기존 정도(正道)로서의 수행관에 대한 심대한 파괴와 붕괴를 불러오는 시대적 사조(思潮)이며 역사적 시운(時運)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자신의 아쉬람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에이즈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은 그가 탄트라를 잘못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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