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주 사랑과 필요를 혼동한다.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거나 그의 곁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갖는 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갖는 자라는 것이 의문이라면,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걸 본 일이 있는지 다시 보라.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인가?
그들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받는 상태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상태와 사랑의 상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이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필요가 만족이 안되면 대부분 실망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내가 당신에게 던져주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 모두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모두 거둬들이고 한데 모아서 던져 버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이 한때 그것 때문에 곤란스러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 사랑을 배워야할 한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장 지고한 느낌이 주는 행위라는 것을, 주는 행위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안다면, 주는 자로서 우리는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일은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사랑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삶에서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사랑에 빠져 본 이가 몇인가?이제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바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이 사랑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지 않게 된다. 당신은 환희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들은 그것이 모든 생명을 포함하고,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한다는 것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360도의 원이다. 그것은 그 원의 30도만 떼어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어야 한다. 마치 하느님이 그 모두인 것과 같이 그러하다. 이해하는가?
이제 여기서 도덕은 이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조건적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 그리고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해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당신의 부모를 이해해준다면 그것은 용서이다. 그것이 당신에게서 깨끗이 정리가 되면, 부모에게 전달될 것이다.그때 당신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감싸게 된다. 이것을 이해한 이가 몇인가? 그렇게 될 지어다.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의 성탄절과 부활절을 축하할 수 있게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들이 소속된 문화에서 감사하는 시간으로, 주고 나눔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의식적 입문절차이다. 주고 나누는 것, 그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분명히 당신은 다시 그들의 자식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당신 자식과 같은 아이를 부모로 두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절망스럽지 않은가?
출처 : 카페 시크릿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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