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6일 금요일

RAMTHA 람타 - 마음열기 5 - 왜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방해해 왔는가?

왜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방해해 왔는가?
그 이유는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다보니,
당신의 사고 작용은 물질현실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삶에 대한 당신의 전체적인 이해를
당신 스스로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질이란 생각을
극단적인 범위까지 변형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각의 한 단계이다.
생각을 빛으로,
빛에서 전기단위로 낮추고,
그러고 나서 전기단위를
양의 전하와 음의 전하를 띠는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물질 형상 안에서
하느님과 연결 될 때마다.
당신은 생각을 원래 모습인
순수와 나누어지지 않은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나눔과 대립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다.
당신이 물질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생존에 치우칠수록,
당신은 점점 더 상반되는 차원의 용어들을 가지고 삶을 보게 된다.
위/아래,
가까이/멀리,
빨리/천천히,
밝은/어두운,
뜨거운/차가운,
좋은/나쁜,
긍정적인/부정적인 같은.

순수 생각의 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른 세상을 보거나,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당신 자신과 생명을 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라.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다른 실체들이

어떤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변형인 것이다.

당신은 변형된 에고
-물질적 삶과 생존에 치우쳐 있는 뇌의 추론 부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변형된 에고는
시간과 거리, 분리라는 환영에 따라 인식하는 그것이다.
생존과 세상으로부터 인정이라는 견지에서 인식하는 그것이다.
순수 생각을 분열하고 심판하는 바로 그것이다.
순수한 생각은 당신들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재빨리
그것이 당신에게 옳은지 그른지,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분별한다.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여
긍정이나 부정으로 나누어 놓을 때마다,
당신은 그것을 낮은 진동률의 가치로 변형시켜 버린 셈이 되었다.
앎은 그 어느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당신이 알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진실한지 정확한지
당신은 결코 곰곰히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진실하고 정확하다.
앎은 생각의 무게를 달아보거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앎은 생각이 있음이기를 허용한다.
당신의 사고 작용이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허용한다.
더 섬세한 소리를 듣거나,
몸이 더 가벼워지기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앎이 몸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여러 가지 현실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음’은
당신의 뇌가 더 위대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매순간 영성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앎은 뇌에서 퉁겨져 하느님 마음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이 지상에 안전하게 묶어 두고
제한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이 무한한 앎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모든 생각이
판단에 따라 변형되지 않을 채
두뇌 의식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몸이
그 생각들을 충분히 경험 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변형된 에고 -그것은 당신의 욕구를 신뢰한다- 가
허용하는 위식을 통하여 뇌하수체는
뇌의 다른 부위를 활성화하여,
무한한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이 원하고 있을 때,
무엇이 ‘문득’
당신으로 하여금
창조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이
당신의 앎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였을 따름이다.
당신이 한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창조적 생각은 늘 거기 있었다.
당신이 찾아 주기를
그래서 당신의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를 기다리며,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사고 작용이
판단과 변형된 생각에 얽매이는 것이 덜할수록,
초의식의 생각들은 당신의 뇌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이 쉬워진다.
꽃을 볼 때,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꽃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는 판단이다.
순수한 것은 ‘꽃’이라는 생각이다.
당신이 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꽃, 빛, 생명, 있음’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생각의 순수함과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높은 진동률의 전기단위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모든 것을 동등함과 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험을 제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의 뇌를 활성화한다.
무언가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당신이 ‘이건 좋아’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다른 무언가는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 자신을 다독거리고 ,
당신 자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하느님이다. 라고 말하라.
당신의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행할 때에도,
그것이 선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하느님이다. 라고 말하라.
그 말은 그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단순히 그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삶의 경험임을 의미한다.
그들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을 당신이 볼 때에,
그들을 있음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보지 말라.
그들의 표현을
좋다거나 나쁘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변형된 것에 대한 인식을 당신 안에 만들어 낸다.
당신이 인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
하나의 느낌으로 기록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기록 된
그러한 느낌은
앞으로 계속해서
당신 자신의 행동과
당신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는 하나의 전례로 자리 잡게 된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당신의 면면을 비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점을 찾아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관심이 그러한 면면으로 쏠린 것이다.
다른 실체는 간지 내면을 판단하는 거울이자,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당신에 대한 판단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을 있음으로서 보라.
그리고 소위 말하는‘있는 그대로’ 보라.
그들이 남들에게
잔혹하거나 가증스럽게 대하고 있다면,
그들을 잔혹하고 가증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가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대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표현에 대해 그들이 나쁘다. 옳지 않다.
사악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판단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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