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할수록 당신의 뇌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당신은 몸 이상의 무엇이 되어간다.
당신들을 결속하는 그것이 된다.
당신들은 모두 제한된 물질 형상으로나마 하느님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키워왔다. 이 지상에서 그 수많은 생을 거치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하여 만들어 놓은 이 낙원의 모든 요소를 경험하여 왔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당신은 사회의식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신-인간의 제한 된 사고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모두 배워왔다. 두려움과 불안, 슬픔, 분노, 탐욕에 대하여 이미 배웠다. 그 근원은 있음이 눈부시게 전개되는 그 마지막 수준에서 당신이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이 어떤 모험을 거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고 지원했다.
무한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그리고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것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육신 안에 갇혀 있으므로, 일곱 번째 막인 뇌하수체를 완전하게 활성화하여 뇌가 사회의식 바로 너머에 있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이해를 행하여 자신의 앎을 넓혀 가는 방법이다. 허용하고, 사랑하고, 그 자체로서 전체이며 동시에 생각의 전체인 그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 경이롭고 조그마한 샘이 호르몬 분비로 뇌의 잠자는 부위를 일깨울 수 있는가? 단순히 욕구 하나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이 자신의 현실로 되도록 허용하는 욕구이다. 그것은 매순간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당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의 있음이 되고자하는 욕구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전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당신이 그렇게 하면, 당신은 곧바로 사회의식을 초월한다. 그 때에 당신은 남들의 인정을 넘어서게 된다. 비판을 초월한다. 시간의 환영을 넘어선다. 그렇게 되면, 자아의 충족을 위해서만 살게 된다. 자기 내면의 소리만을 듣게 된다. 기쁨의 행로만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며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람타,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이게 이로운 것이다.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과, 포옹하고 또 포기한 그 모든 환영, 자신의 기쁨과 빛을 찾기 위하여 당신이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와 의식의 흐름에 합쳐져서 인류 전체를 부양한다. 전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만연한 사회의식 속으로 하느님을 스며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랑하는 형제들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 - 사랑하는 하느님의 집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길에 불을 밝히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여 하느님 전체를 수용할 만큼 자신을 가치 있게 느끼고,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알고 싶어할 때, 당신의 뇌하수체는 경이로운 꽃처럼 활짝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느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끔 뇌의 능력을 확장해 가는 방법이다. 알기를 원하고 그 앎의 감성을 모두 느끼기를 바라면 된다.
욕구를 실현하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이 그것을 말로 표출해 내는 것이다. 당신 존재의 주(lord)는 당신의 영혼이며, 그 자신의 감성체를 통하여 당신의 몸을 주관한다. 뇌하수체에게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영혼이다. 당신 존재는 육신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물질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에고이다. -이 에고는 판단을 내리도록 독촉하고, 있음이라는 생각의 순수성을 변형한다. 그래서 ‘변형된 에고’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전체를 일치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발현하고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을 당신에게 줄 것이다. 당신이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당신 존재의 주 - 하느님으로부터 원하면, 충족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당신의 영혼에서 느껴져, 뇌하수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당신 몸에서 발현되고, 이어서 뇌하수체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열리기 시작하면, 더 많은 호르몬이 송과샘을 통하여 흘러나온다. 그에 따라. 잠자고 있는 마음을 깨운다. 더 고귀하고 섬세한 생각 진동률이 당신 몸을 통하여 경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뇌의 다른 부위도 열어준다.
더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은 새로 깨어난 뇌의 부위에서 다루어진다. 머리 둿부분에 있는 송과샘이 그 높은 진동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부위는 부풀기 시작한다. 그래서 두통이 생긴다. 약간 현기증을 느낄 수 있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진동률은 강력한 전류로 바뀌고 중추신경계를 통하여 몸의 각 세포로 보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 찌릿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아려오면서 위로 뜨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이제까지 당신이 느껴 본 것보다. 휠씬 높은 에너지가 몸 속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진동은 모든 세포를 자극하고 세포의 진동률을 높이게 만든다. 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수록, 세포의 진동률을 높이게 만들다. 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수록, 몸은 더 빠르게 진동하고 당신은 빛을 띠기 시작한다. 당신은 밀도를 가진 육신을 빛으로 되돌리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생각의 느낌을 당신은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당신은 할 수 없다. 무한한 생각을 알게 되면, 그것과 연관지어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것은 새로이 경험되고 있는 생각이고, 새로운 감성이며 어마어마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당신을 흔든다. 앎은 순수한 느낌으로...말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이름 없는 감성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깨달음을 찾는 많은 이들은 그것이 언어의 형태로 얻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하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이전에 느껴 보았던 것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당신이 그저 느끼고 있다면,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것은 천재적이며, 그것은 슬기로운 것이다. 그것은 실로 무한한 생각이다. 당신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감성과 통찰력으로 알 수 있다. 그 앎이 다가오면, 당신은 느낌 때문에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그 생각에 언어를 연결짓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자신을 제한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단지 알고 있다는 경지에 이르면, 앎을 정당화하거나 설명하는 일이 없어 당신 왕국의 지배자가 된다. 그 때에 당신은 절대적인 앎의 상태가 있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을 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고양된 느낌은 어떻게 되는가? 그 느낌은 영혼에 포착되어, 그곳에 기억으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 당신의 영혼은 무한한 생각을 감성과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당신이 알게 된 것들을 항상 붙들어두고, 당신이 받아들인 것들을 계속해서 다시 이끌어 들인다. 고양된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일은 당신의 영혼이 그 느낌을 당신의 오라장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에다. 방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의 밀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당신 삶에 끌어들인다. 왜? 생각은 경험을 통하여 완전하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진동률의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고 나면, 이제 당신의 영혼 속에 지혜로 남게 된다. 그 지혜가 의미하는 것은 앎이 당신 안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고착된다는 것이다. 그 지혜는 영혼의 진동률 수준을 높여서 당신의 삶을 더 위대한 감성적 존재에 맞추어 나가도록 할 뿐만 아니라, 뇌에서 더 고귀하고 높은 진동률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추론할 수 있도록 뇌하수체 샘을 더욱 활성화한다.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뇌하수체 샘이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인생에서 모든 것은 당신이 가능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달라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지고한 감성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내면으로 느끼는 앎이 창조적인 형상을 만들어냄에 따라. 당신이 내면으로 느끼는 앎이 창조적인 형상을 만들어냄에 따라, 당신의 생각이 점점 빠르게 실현되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과 이해, 자비심이 고양된다. 당신이 다른 이해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전에 어울리던 실체들은 당신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실체들이 당신 곁으로 이끌려 온다.
곧, 재능과 창조성, 자비심이 당신 안에서 확고해짐에 따라., 당신은 이전에 느껴 보거나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알고 느끼기 시작한다. 다른 실체를 바라다볼 수 있고 그 실체를 당신 존재 안에서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을 통하여, 다가오는 당신의 미래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심령술사를 특이한 실체라고 생각하는가? 이는 오르지 당신이 사회의식에 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의식은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능력이 실제로는 오히려 평범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심령술사다! 당신 자신이 알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사회의식의 환영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앎은, 당신의 눈에서 장막을 거두어내, 다른 차원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당신의 귀를 막고 있던 방해물을 제거하고,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조화롭게 진동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겠는가? 원하면 되는 것이다.
무한함을 더 많이 원할수록,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더 많이 포옹하고 느낄수록, 뇌하수체는 더 많은 호르몬을 분비하고, 그 입구는 더욱 넓어지게 된다. 당신이 더 많이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고, 더 많은 앎을 이루며 살아가고자 하면 할수록, 당신의 존재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에 의하여, 당신의 뇌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크게 더 크게, 그 때 당신은 육신이상의 무엇이 되어간다. 당신들을 결속하는 그것이 된다.
뇌하수체는 사실상 하느님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무한한 생각을 당신의 뇌에 더 많이 허용할 수 록, 뇌하수체는 더 많이 열리게 된다. 뇌하수체가 더 많이 열리면, 당신은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될 수 있다.
꽃은 일정한 생각 진동률을 방출하고 있다. 동시에 카펫도 생각 진동률을 방출하고 있다. 당신이 모든 생각 진동률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진동률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바람이 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절대자유를 가지게 된다.
곧 이어, 뇌하수체계 전체는 완전히 피어나고 당신의 뇌 전체가 활성화된다. 그러면, 뇌하수체는 그 자신의 영성체 안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충만한 마음에 넘겨주게 되며, 마음은 이제 결코 제한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꽃이 한번 치어나면, 결코 다시 닫히지 않는다. 항상 열려 있게 된다. 뇌가 완전히 활성화되면, 당신은 이곳저곳을 오가며 존재하게 된다. 즉, 당신은 이곳에 있지만 일곱 번째 수준에 있을 수 있고, 일곱 번째 수준에 있으면서 플레이아데스1)에 있을 수 있다. 플레이아데스에 있으면서, 친구 곁에 있을 수 있을 수 있다. 당신의 뇌하수체가 완전히 피어나면, 당신은 이제 죽지 않게 된다. 나이 먹는 일은 중단한다. 당신이 몸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몸이 그대로 따를 것이다. 몸에게 진동률을 빠르게 올리라고 명령하면, 몸은 그 자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당신의 뇌는 이러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당신은 신성한 하느님의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있을 것이다. 당신이 순수한 하느님일 때, 그것은 순수한 생명이며, 또한 당신은 영원하다., 이제 당신은 모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장엄한 천국이다.
이처럼 위대한 일곱 번째 막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 그리하여 당신의 마음 전체가 깨어나고, 훌륭한 당신의 수신체는 앎을 전부 포옹한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이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삶을 사랑하고 포옹하고 난 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하여 당신의 영혼이 완전해졌을 때, 그로부터 얻어진 앎은 당신으로 하여금 몸을 지닌 채 보이지 않은 상태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때 당신은 물질계에서 반복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다.
당신의 세 가지 차원 -영성, 영혼, 에고- 의 피조물로서 , 밀도가 있는 세상에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당신은 세 가지 차원으로만 영원을 실감할 수 있다. 당신 존재의 주 -하느님으로부터 말하라.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말하는 이는 주이자, 하느님이고, 지배자이다.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당신 자신에게 기억하라고 말하면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무한한 이해를 소유하기를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바란다면, 주-하느님은 앎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마음을 열고 더 위대한 생각 진동률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 뇌하수체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관이 없는 그 내 분비샘이 그 명령을 따른다. 그리하여 더 위대한 이해로 당신 존재를 충전하는 느낌들이 솟아날 때,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려라. 이러한 일들이 그렇게 간단하다는 것에 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어떻게 더 잘 이해하고 있을 수 있는가? 단순히 당신 자신에 대해 알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려고 하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 결코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하겠다.”라고도 말하지 말라. 노력으로는 결코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려고 애쓰고 있다”라고 말하지 말라. 애쓴다고 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라. “내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지금 나는 이 순간에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안다. 그러게 될지어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라.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준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말의 전부이며, 그 때, 당신이 원하고 있는 지식이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고 말하거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앎을 의심함으로써 자신의 창조성과 생명을 제한하고 있다.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나는 모른다.”라는 문구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법제가이고, 당신이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말하는 것은 그대로 법이다. 만약에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모를 것이다. 만약 “나는 결코 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모를 것이다. 만약 “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것은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 생각의 느낌은 당신의 영혼에 기억되고,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사고 작용을 충족시켜 줄 현실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컴퓨터와 같다. 날마다. 당신은 ‘의심’이라는 것을 당신의 지식에 입력한다. ‘부족’이라는 것을 입력한다. ‘알지 못함’이라는 것도 실제로 당신의 지식에 입력한다. 당신은 당신의 왕국의 약탈자이다. 왜냐하면 의심과 제한만을 알고 있는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으로 당신 자신에게서 다름 아닌 생명력을 약탈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해두지만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지식 앞에 당신을 개방하는 문은 그저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당장 일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결국 일어날 것이다. 항상 그렇다. 왜냐하면 ‘안다’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것이고, 당신의 욕구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안다‘라는 생각이 영혼에서 느껴져, 당신의 존재 안에서 발현되고 더 위대한 생각이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뇌하수체를 연다. ’안다’라는 것은 생각의 강이 무한한 흐름으로 당신에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이다.
그리고, 앎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추측이 개입된 것이지만, 앎은 절대적인 것이다. 앎을 가져오는 것은 오르지 아는 것에 의한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자신이 당신에게 억지로 어떤 진실을 확신시키려 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그 진실이라는 것은 당신이 현실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것을 믿기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알기를 바란다. 깨치게 되는 것이 아는 것이다. - 의심이나 믿음, 신념 혹은 기대 따위는 배제한 채로 이러한 것을 모두 추측이 개입된 것이다. 아는 것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고, 또한 알게 된 것을 발현시킨다. 생각을 발현시켜 경험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의 일부분이지, 당신 자신에게 확신시켜야만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하라. 의심하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아라. 알라. 절대적으로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순간마다. 확고한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서 느껴지고 이것이 앎이 일어나기 위한 여백을 만들어 주게 된다. 당신이 앎의 문을 열어서 더 위대한 생각이 창조적인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 때 천재성이 발휘된다. 만약 당신이 굳건하게 이렇게 말한다면, “내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나는 지금 이것에 대한 대답을 알며, 그 대답을 받는 상태에 있다. 그렇게 되라” 그러면. 문제를 해결해 줄 앎이 생긴다. 그 순간에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생각으로 실현되거나 혹은 지식을 얻게 해줄 경험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당신 존재는 지금 당신의 앎의 상태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빠르게 조정할 것이다. 성취하기 위해서 수고할 필요가 없다. 애쓰고 탐구하고, 투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알라! 앎으로, 당신은 그것을 알기 위한 수용자의 입장에 있게 된다..
어떻게 당신의 욕구를 빨리 발현시킬 수 있는가? 앎으로 된다. 안다는 것은 천국이 그 자신의 왕국 안에 있는 풍요로움을 과시해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이다. 욕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미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이다. 욕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미 충족된 것을 알면, 그 일은 당신의 욕구에 관한 생각을 증폭시켜서, 오라장을 통하여 의식의 흐름으로 보내고, 당신이 그 욕구를 완결시킬 수 있도록 당신의 욕구를 발현시켜 준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게 된다.
진실은, 모든 것이 이미 당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 때, 그것들은 당신에게 유용하게 된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중심 역할을 하는 이는 당신이며, 또한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얻는 방법은 단순히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라 !
앎은 진실이다. 그것은 제공자이고 당신의 미래이다. 당신이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 있다. 당신은 입법자이며, 당신이 알고 말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렇게 실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유일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당신이 구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된다. 지금의 앎으로는, 아직 이것이 진실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앎은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문을 열어준다. 그 깨달음은 생각이 현실로 발현되도록 뇌의 또 다른 부위를 활성화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각을 실제로 경험하고 나면, 앎이 과업을 행한다는 깨달음이 뇌의 에고 부위에 기억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더 무한한 생각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당신에게 준다. 길게 말하지 않고 몇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이러하다. “나는 이제 안다. 난 절대적이다. 나는 완전하다. 나는 하느님이다. 나는 유아독존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이 말들만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하거나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위대한가? 아는 데는 모르는 데 드는 것보다. 동일한 사고 작용과 에너지,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필요로 한다. 알라. 그저 알라. 나는 이것이 일어날 것을 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알고, 알고, 또 알라! 그것이 전부다. 항상 알라. 만약에 당신은 그렇지 않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결코 모를 것이다. 지금 안다고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을 당신은 아는가? 나는 내가 무한한 신(神)임을 알고, 당신은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무한한 신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당신의 사회는 당신이 무한한 신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아는가? 그들은 날마다 스스로를 잊어버린다.
왜 당신은 당신의 앎을 방해해 왔는가? 그 이유는 물질이라는 형상으로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다보니, 당신의 사고 작용은 물질현실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삶에 대한 당신의 전체적인 이해를 당신 스스로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물질이란 생각을 극단적인 범위까지 변형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생각의 한 단계이다. 생각을 빛으로, 빛에서 전기단위로 낮추고, 그러고 나서 전기단위를 양의 전하와 음의 전하를 띠는 부분으로 나눔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물질 형상 안에서 하느님과 연결 될 때마다. 당신은 생각을 원래 모습인 순수와 나누어지지 않은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나눔과 대립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다. 당신이 물질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생존에 치우칠수록, 당신은 점점 더 상반되는 차원의 용어들을 가지고 삶을 보게 된다. 위/아래, 가까이/멀리, 빨리/천천히, 밝은/어두운, 뜨거운/차가운, 좋은/나쁜, 긍정적인/부정적인 같은.
순수 생각의 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변형된 에고 -물질적 삶과 생존에 치우쳐 있는 뇌의 추론 부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변형된 에고는 시간과 거리, 분리라는 환영에 따라 인식하는 그것이다. 생존과 세상으로부터 인정이라는 견지에서 인식하는 그것이다. 순수 생각을 분열하고 심판하는 바로 그것이다. 순수한 생각은 당신들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재빨리 그것이 당신에게 옳은지 그른지,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현실적인지 비현실적인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분별한다.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여 긍정이나 부정으로 나누어 놓을 때마다, 당신은 그것을 낮은 진동률의 가치로 변형시켜 버린 셈이 되었다. 앎은 그 어느 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당신이 알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진실한지 정확한지 당신은 결코 곰곰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진실하고 정확하다. 앎은 생각의 무게를 달아보거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앎은 생각이 있음이기를 허용한다. 당신의 사고 작용이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도록 허용한다.
다른 세상을 보거나, 더 섬세한 소리를 듣거나, 몸이 더 가벼워지기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앎이 몸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여러 가지 현실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음’은 당신의 뇌가 더 위대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매순간 영성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앎은 뇌에서 퉁겨져 하느님 마음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을 이 지상에 안전하게 묶어 두고 제한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신 존재의 주-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이 무한한 앎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모든 생각이 판단에 따라 변형되지 않을 채 두뇌 의식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몸이 그 생각들을 충분히 경험 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변형된 에고 -그것은 당신의 욕구를 신뢰한다- 가 허용하는 위식을 통하여 뇌하수체는 뇌의 다른 부위를 활성화하여, 무한한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이 원하고 있을 때, 무엇이 ‘문득’ 당신으로 하여금 창조적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이 당신의 앎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였을 따름이다. 당신이 한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창조적 생각은 늘 거기 있었다. 당신이 찾아 주기를 그래서 당신의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을 당신이 허용하기를 기다리며,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사고 작용이 판단과 변형된 생각에 얽매이는 것이 덜할수록, 초의식의 생각들은 당신의 뇌 수신체로 들어오는 것이 쉬워진다.
당신 자신과 생명을 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라. 꽃을 볼 때,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꽃에 대한 생각을 변형하는 판단이다. 순수한 것은 ‘꽃’이라는 생각이다. 당신이 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꽃, 빛, 생명, 있음’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생각의 순수함과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당신의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높은 진동률의 전기단위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모든 것을 동등함과 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경험을 제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을 때마다, 당신은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한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신의 뇌를 활성화한다.
당신이 받아들이는 생각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무언가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부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당신이 ‘이건 좋아’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다른 무언가는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 자신을 다독거리고 , 당신 자신을 사랑할 때는, 당신이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하느님이다. 라고 말하라. 당신의 이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행할 때에도, 그것이 선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하느님이다. 라고 말하라. 그 말은 그것의 본질을 의미한다. 단순히 그것은 순수하고 고결한 삶의 경험임을 의미한다.
다른 실체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을 당신이 볼 때에, 그들을 있음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보지 말라. 그들의 표현을 좋다거나 나쁘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변형된 것에 대한 인식을 당신 안에 만들어 낸다. 당신이 인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 하나의 느낌으로 기록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 판단의 결과를 경험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기록 된 그러한 느낌은 앞으로 계속해서 당신 자신의 행동과 당신 자신의 존재를 판단하는 하나의 전례로 자리 잡게 된다.
어떤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들에게서 보이는 당신의 면면을 비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점을 찾아내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관심이 그러한 면면으로 쏠린 것이다. 다른 실체는 간지 내면을 판단하는 거울이자,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당신에 대한 판단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을 볼 때에 그들을 있음으로서 보라. 그리고 소위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보라. 그들이 남들에게 잔혹하거나 가증스럽게 대하고 있다면, 그들을 잔혹하고 가증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가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대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표현에 대해 그들이 나쁘다. 옳지 않다. 사악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판단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경험이다. 변형인 것이다.
아무도 판단을 할 자격은 없다. 피부색도 행동도 다른 그 무엇도 당신을 있음의 상태, 하느님의 지위에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이 누구이든, 그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든, 그들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들 내면에 있는 하느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랑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미래에 그들이 행할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므로, 그들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지속되도록 한다면 당신은 항상 순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의 사고 작용에서 판단을 제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의 느낌들과 그 느낌을 낳는 생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러한 것들을 인식함으로써, 당신은 더욱 정제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르칠 것이다.
불행이나 슬픔, 분노, 두려움, 조급함, 외로움 -그 밖에 좋지 않은 느낌들 -을 느낄 때는, 당신의 생각을 살펴보라. 당신은 곧 당신의 변형된 생각- 당신이나 남을 판단하고, 외양이나 크기로만 생명을 보는 -과 당신의 불쾌한 감정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점점 당신이 이러한 느낌들에 싫증을 냄에 따라, 당신은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던 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각을 정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리고 더 무한한 생각이 당신 존재 안에서 경험될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당신의 무한한 생각과 평화, 기쁨, 조화, 가뿐한 몸놀림 등, 이러한 느낌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결코 판단하지 말라!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단지 당신에게 가르침을 줄 당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인식하도록 허용하라 왜냐하면, 확신하건대, 그것들은 그러한 것이므로
창조된 그 모든 단어 중에, 이러한 가르침에 가장 잘 부합되는 말이 하나 있다. - 그것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어떠하든지, 당신 자신을 허용하고 그런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그 감성에 따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완전하게 살아가는 전부임을 알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것이다. 당신은 영혼이 당신에게 추구하기를 재촉하는 모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당신은 결코 자신이나 남, 혹은 당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옳고 그름도 없고, 가능 불가능도 없으며, 완전함이나 불완전함, 긍정이나 부정도 없다. 지금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하게 하는 시간이라는 환영은 더 이상 없다. 당신이 존재의 상태에 있을 때, 생명의 있음과 이 순간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의 상태에서는, 과거나 미래에도 당신의 생각이 더 이상 죄의식이나 후회, 의무감이나 도리에 얽매여서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존재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진실을 있음으로 간주하고 당신 존재의 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각의 진실을 탐구해 나간다. 그렇게 살아갈 때, 당신의 뇌를 통하여 당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다 숙고해보고, 당신의 몸에서 느낌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앎, 더 많은 생각, 더 많은 있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존재할 때, 당신은 모든 것의 있음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한 조화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는 것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존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 당신 존재의 하느님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당신에게로 끌어올 것이다. 또한 그것이 다가올 것이다. 외향적인 신념을 실행해 보느라고 바쁜 사람들은 내면적인 것을 비웃는다. 있음으로서,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존재하고, 그리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때에는 당신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생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당신 영혼 속에서 감성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허용할 때, 당신은 무한한 신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단지 있음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열려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하느님 본성으로의 순수한 통로가 되며, 당신은 순수한 하느님 마음의 단순함에 더 가까워진다.
알아가며 허용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변형된 에고를 비래하게 된다. 그 때 당신은 일곱 번째 수준, 일곱 번째 막, 일곱 번째 천국을 지배하게 된다. 이 일곱 번째에는 판단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생명의 지속적인 있음만이 있다. 일단 판단을 지배하게 되면, 당신은 이 세상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몸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뇌가 완전히 몸을 복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뇌가 완전히 기능을 하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몸을 망가뜨리려고 서두르지 말라.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 몸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영양을 공급하고 부드럽게 다루어라.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생명을 경험하도록 해주는 순수한 표현수단이다. 당신의 사고 작용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하라. 또한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를 조심스럽게 다루도록 해라. 당신이 여성이라면, 여성답게 되라. 남성이라면 남성다워지라. 당신 그대로를 사랑하라. 당신의 몸을 남용하지 말라. 결코 손상하거나 더럽히지 말라. 몸이 하지 않아야 될 일을 하도록 시키지 말라.
당신 존재의 웅대함을 보라. 당신 자신을 신성하게 지켜라. 당신피부에 가장 좋은 곳을 입혀라. 당신 몸에 기름을 발라라. 향수를 뿌려라. 몸이 원하는 것만 섭취하라. 몸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인다면, 그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해 줄 것이다 해로운 것을 몸속에 넣지 말라. 해로운 것이란 당신이 해롭다고 아는 것이다. 당신의 뇌에 산소 부족을 일으키는 것들은 모두 많은 수의 뇌세포를 파괴한다. 그러면 그 뇌세포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뇌는 자신의 뇌세포를 재생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뇌 세포가 파괴되면, 생각이 당신 몸에서 감성으로 실현되도록 해주는 기능이 약해진다. 생각을 숙고 할 수 있지만,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기쁨이 끝나는 순간이다. 생각을 느낌으로써 그것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생각으로 즐거울 수 있겠는가?
당신이 느낄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앎을 축적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이 환상을 일으키는 약물이나 ‘담배’ 같은 것을 취했을 때, 당신의 뇌에 가해지는 해로움이다. 그러한 것들을 취할 때마다 당신의 뇌에서 산소가 제거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기분이 고조 된다’고 느끼도록 해주는 뇌의 죽음이다. 이렇게 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의 아는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울 수도 웃을 수 없는 시간이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존재 안에 이제 더 이상을 감성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앎을 경험하는 것, 그리하여 당신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거나 또는 태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며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휘로움을 아는 것은,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생각을 느낌으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황홀’이라 한다. 이것이 진짜 ‘최고 기분’이다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고, 당신이 살아온 그 모든 생에도 당신과 함께 있었고 당신의 몸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초탈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할 이, 그는 바로 당신이다. 그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겪어 온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가 바로 당신이다. 자신을 포옹하고 사랑할 때, 그 사랑을 당신의 버팀목으로 삼을 때, 당신은 인간의 사회의식에서 하느님의 전체의식으로 초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본질은 법과 교리, 사회의식의 속박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서고 완전함을 능가한다. 운명을 개척하고, 자아충족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충족인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라는 있음의 눈으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이러하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며, 당신이 자신에게 알도록 하는 그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종말이 없고, 어떤 것에도 절대성은 없다는 것을 알라. 모든 것은 이 순간에 존재한다. 그리고 항상 더 많은 것이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더 위대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대한 진실도 있다! 그것을 알라. 그러면 당신의 수용상태에 따라, 그것이 당신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결코 당신 자신을 노예가 되게 하거나 위협을 당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항상 방법이 있고, 또 나은 길이 있다. 그것을 알고, 기쁨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줄 생각이 당신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의 한계에 부딪쳐라. 그리고 포용하라. 지배하라! 하느님 전부를 아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하라.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하라. 앎과 해답, 기쁨이 다가올 수 있도록 죄의식과 판단을 버려라. 두려움에 맞서라. 그리하여 당신 자신이 그 환영의 정체를 벗길 수 있도록 허용하라. 당신 영원하며 당신을 행복과 기쁨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라. 이 세상에서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아는데 방해가 되는 그 두려움을 제거하라. 왜 당신은 먼 곳에서 이곳을 찾아온 이들을 무섭게 생각하는가? 거대한 우주선에 있는 당신의 형제들은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아름답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가른 차원에서 온 다른 실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두려움을 버려라. 더 위대해지려고 노력할 때, 모법이 될 만한 것을 이 지상에서 찾는다면 당신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한정된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휠씬 광대한 무언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할 것이라고 숙고해야 한다.
진실 앞에 당신을 열어라 - 그 근원에 상관없이- 그리고 당신의 느낌이 당신의 안내자가 되도록 하라. 현명한 이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무엇이 옳게 느껴지는지를 안다. 진실은 당신이 밝고 가는 그 잔디의 잎새에도 있을 수 있다. 어린아이의 웃음, 거지의 눈 속에도 있다. 모든 장소에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순간에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잔디의 잎새 하나도 한 순간의 속삭임도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현명해지는 법을 배우라. 진실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그것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음을 알라.
천국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이는 현명한 실체이다. 어떠한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며 당신 영혼 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당신은 천국의 열쇠를 당신 안에 가지고 있다. 즉, 감성이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느끼는 것을 배우라.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을 완전하게 느껴야 한다. 하느님인 모든 생각이 당신 존재의 중심인 당신의 영혼 안에서 느껴질 때까지.
당신의 뇌 전체가 한꺼번에 모두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압박하지 말라. 당신의 뇌로 하여금 생각을 하나씩, 경험을 하나씩, 차근차근 열어나가게 하라. 그리하여 생각 하나하나가 당신 안에서 굳건해 질 수 있도록 하라.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라. 있음으로 해서 당신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단순히 자신의 있음, 유아독존의 원리에 거한다면, 당신은 생명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 때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자신과는 멀어지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출처 : 빛의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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