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6일 금요일

RAMTHA 람타 - 경험의 가치

경험의 가치

당신이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 보가 훨씬 더,

당신은 사랑 받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고 있는 신 이외에는
그 어떤 생각으로도 간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탐구하는 모험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 ((하느님이 물질이라는 제한 된 형체로 살아가는 삶)) 에서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당신은 인간이라는 세포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제한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나서야 무제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느님 전체((순수 생각의 광대한 영역에서부터, 물질적 제한에 이르는 전 경로))를
경험하고 포옹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인 당신 자신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슬픔과 자유, 그리고 영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록 당신은 매우 어렵고 심각하게
이 세상의 게임과 환영을 수행해내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있는 이유는
당신을 가르치고,
확장하고,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당신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삶은 지혜라고 하는
생명의 가장 위대한 보상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게임을 진행하고,
당신의 환영들을 경험할 수 있는 무대일 뿐이다. ​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모아진 가장 경이로운 보배이다.
지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생각의 세계에서 행한
당신의 모든 모험으로부터 얻어진 느낌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멋진 옷이나,
으리으리한 집, 아니면 아주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가?

오로지 당신 자체,
당신이 생명의 원리를 겪으면서 얻었던 모든 느낌을 가지고 간다.
느낌이라는 것은 생각의 모든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규율에 의한

폭정과 속박,
종족의 분열과 타락,
남녀간 또는 형제간의 반목 등을 통해서
인류가 배우게 된 모든 것들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상대를 굴복하게 하고,
남의 자유를 부정하고,
여성을 차별하여
남성보다 비하하는 것이
어떠한 느낌인지 당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먼저 그러한 것을 현실로 만들 것을 꿈꾸고,
또한 의도적으로 그 꿈대로 살아가는 창조자가 되어 보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결코 그러한 일들을 감성적으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삶과
순간순간을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그것은 너무나 확고부동한 현실이 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증에 걸리고 불안해하며,
그 꿈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당신은 묻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짐승같이 대하도록 허용한 하느님은 어디로 있는가?

그가 결과적으로 이렇게 잔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것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글쎄, 하느님은 늘 거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환영 전체였고,
당신의 게임전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을 계속해서 사랑해 왔다.

왜냐하면 당신이 구상하는 대로 
신의 꿈을 경험하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단지 당신은 자신이 먼저 꿈을 경험하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단지 당신은 자신이 먼저 그 꿈을 창조했다는 사실,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당신은 지극히 불행하고

슬픈 이야기로 당신의 환상을 엮어 나간다.
당신은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다.
당신의 마음을 닫아 버린다. 우
상을 섬긴다.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가한다.

당신은 심판하고 증오하고,
소유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실로 오만하다.

과연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그렇게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 결말은 어떠한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그래서 그것이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뛰어난 실체인 당신들 모두는

나름대로 근심걱정과 사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나,
당신이 진행해 오면서
자신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당신의 환영 아래 깊숙이 숨겨온 게임들보다는 훨씬 위대하다.

당신이 얼마나 강하고 훌륭한가를 알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저주하거나,
비판하거나,
자신을 변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로 내가 왔다.


나는 당신의 과거 모습 전체이며,
또 당신이 앞으로 그러할 모습 전체이기도 하다.

그러면 당신은 앞으로는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고
죄의식과 두려움,
자기부정에 몸부림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실로 그보다 더 위대하다.

내가 왜 당신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가?

당신이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존재의 모근 영역에 있어서,
당신의 모든 모습은 나이다. ​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환영을 숙고하고 창조해 내도록 해주는
그 모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유아독존인 나는
이곳에서의 상식적인 표현을 초월한 사랑이다.
어떤 조건이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당신 그대로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이 자신의 잘못과 실패라고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간이

옳고 그름,
완전과 불완전을 창조하면서 또한
죄의식과
후회라는 족쇄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삶의 진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대들이여,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어떤 것을 했다 하더라도,
이 지상에서 여러 번의 생을 경험했던 공덕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현재의 당신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 삶의 경험이었다.

또한 실로 가장 소중하고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대단한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의 당신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지혜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하므로.

당신이 해왔던 그 모든 것을

나 또한 꼭 같이 했다.
당신이 저질렀던 것처럼
나도 그 만큼 잘못을 저질렀다.

힘과 덕이 모자란 탓이라고
당신 자신을 힐난하는
그 모든 일을 나도 역시 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의 연약함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존재의 강함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당신들 모두를 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했든지,
그것이 아무리 나쁘고 비열하다고
당신이 판정 내렸더라도,
당신은 단지 자신을 위한 배움을 창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당신은 상처입고,
고통 받았으며,
슬퍼하였고,
자신을 비하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것으로부터 일어섰다.
지금 여기에 당신이 있고,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고 포옹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패하였거나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을 숙고해 주기 바란다.
당신이 탄생한 그 순간부터,

당신과 당신의 형제들은
생각,
모든 생각,
생각에서 생각 또 다음 생각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하였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 존재의 하느님인
영성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그 모든 생각 ((하느님의 모든 차))의
느낌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당신은 모든 생각을
당신의 영혼 안에서 받아들이고 느낀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을 좀 더 이해해야만 한다면,
영혼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험하도록 권할 것이다.

왜?
오직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그 생각의 모든 양상을
감성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은 생명이라고 하는 경험에 대한 보상이다.

당신은 영원토록 생명을 진화하게 하고

확장하여 창조해 가도록 종용되어 왔으며,
그러한 모든 창조의 발현
생각으로부터 빛으로,
물질로,
형상으로,
그리고 다시 생각으로,
즉 사랑과 기쁨으로부터,
질투,
증오와 슬픔,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의 반복을 경험하도록 종용되어 왔다.

당신의 영혼은 모든 형태의 생각과 태도,
감성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그 자신을 충족할 수 있도록,
경험에서 경험으로,
모험에서 모험으로 당신을 몰아왔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느님 전체이자
자신의 전체이기도 한
생각 전체를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영혼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굶주려 있다.


당신의 영혼이 어떤 경험에 굶주려 있다는 것은
그 경험으로부터 얻게 될 감성적인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혼은
당신존재를 온통 사로잡아
당신을 새로운 모험,
새로운 경험으로 몰아 부칠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 경험이 끝나고,
그로부터 얻어진 감성이 자리 잡고 나면,
그 경험은 이 지상에 있는 황금 전부보다도
더 귀중한 보배를 당신한테 안겨준다.

그것이 당신을
지혜에게로 이끌어 주었음을 영혼의 속삭임으로 알 수 있다.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또 다시 경험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당신의 영혼은 또 다른 갈망을 갖게 되고,
당신은 다른 것을 행하도록 종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럴 필요가 있고,
그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당신 생명에 있는 불꽃이
당신에게 모든 삶을 경험하고 알기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에게 옳지 않다거나,

혹은 당신이 실패할 거라고 알면서
그 무엇을 경험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항상 진지한 호기심,
흥미와 즐거움을 가지고 허다한 모험을 해 왔다.

시작할 때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잘 몰랐지만,
단지 전에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그 일에 착수하였다.

경험은 새롭고 흥분되는 것이었으며,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배우기를 바랐다.

비록 모험 중에 고통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통’이라는 감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결국 생명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경험은 당신의 삶에서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감성과 이해를 얻기 위한
또 다른 모험을 경험할 것을 재촉하므로,
당신은그 다음 모험에 다시 착수한다.
이렇게 하여 당신은 영혼의 행복과 충족을 얻는다.

당신이 행하는 것은 모험이다,

그것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경험은 당신에게 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당신의 영혼 안에서 느낀다.

어쩌면 그것을
더 잘 해내거나
다르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이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은
그 모험을 경험하고 난 뒤이며,
그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그 모험을 경험하고 난 뒤이며,
그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얻는 느낌은
지혜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먼저 경험을 시작하고
그것으로부터 지혜의 보석을 거둘 때까지는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결코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가 비난받아야 하겠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무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패라는 것은

그것이 있다고 믿는 자에게만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결코!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비천하고, 비열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라도(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다.

얼마나 아무 것도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삶에 있어서
결코 멈취 설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지속적으로 확정되는 모든 순간은
항상 더 크고 넓은 이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항상 무엇인가를 배워 왔던 것이다.

어떻게 불행해 보지 않고 행복에 대해 알겠는가?

당신이 거기에 도달하여
그것이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다른 색깔이라는 것을 알아 내지 않고서,
어떻게 당신의 목적지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결코!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게 왜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가?

소위 말하는 당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들,
실패,
오점들은 더 적절하게 표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
하느님에게로 행한 발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르지 그러한 발걸음을 떼어 놓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배우는 데 결코 죄의식을 갖지 말라.

지혜를 얻음에 있어서 결코 죄의식을 느끼지 말라.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당신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해 왔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모두 필요했던 것이다.
당신들은 늘 옳은 선택을 하였다.

그것들 모두!
당신은 내일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이어져 나가는
참으로 축복된 날들을 살아갈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이 발견하게 될 것은
지금 당신이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삶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영원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당신의 꿈을 창조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그러나 무엇을 창조하든지,
당신은 이해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전체의식의 모든 곳에 추가한다.

당신은 결코 그것을 전체의식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떼어낼 수도 없다.
당신이 기꺼이 겪어보는
그 모든 모험은 생명의 열정과 강도를 더하게 된다.

당신이 포옹하는 모든 생각,
경험하는 모든 환영,
당신이 찾아내는 모든 발견은
아무리 사악하고 비천한 것이라도 당신 자신의 이해를 넓히고,
그 이해는 다시 인류의 의식을 키우고 넓히며,
하느님 마음을 확장한다.

만약에 당신이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
당신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위대함을
인지하는 능력과 삶 전체에 미치는
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게 된다.

과거의 그 어느 부분도 제거해 버리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지고한 경험과
비천한 경험 사이의 마찰은
당신의 영혼 안에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지혜의 진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한 꿈을 다시 꾸어야 하고,
그러한 게임을 다시 창조해 내야하고,
그러한 경험을 다시 겪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경험했고,
그것들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생명의 가장 소중한 보배인,
느낌이라고 하는 것으로
당신의 영혼 안에 기록해 두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곳에 왔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자신을 위해서 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간주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생의 경험에서,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다.

당신은 그것을 세상에 베풀었다.
삶을 펼쳐 나가는데 대한 보상이 추가되었다
당신은 삶은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불꽃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장관이었다.

그것은 존경과 신성함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회고해야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느님이다.

어떠한 인연을 경험라고 있든지, 당신은 여전히 하느님 인 것이다.

당신은 이 생에서 모험을 할 자격이 있다.

하나하나씩 전부다.
게다가, 당신은 아직 대기하고 있는 훌륭한 모험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단지 당신 자신인 하느님 ((삶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당신이 얻은 모든 경험의 가치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 드러나 있는 것))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당신은 결코 유아독존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의 문으로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그대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배울 것은 다 배웠고
싫증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없애라.
어떻게?
그것들을 사랑하고,
포옹하고,
당신 존재 안에 허용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맑은 눈으로
생명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고,
판단하지 않고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존재의 기쁨은 무한히 알 수 있는 힘이 된다.

당신의 삶을 포옹하라.

당신은 신성하며,
당신이 했던 그 모든 것 때문에
당신 존재가 강하다는 것을 알라,
죄의식은 버려라.

슬픈 시늉은 그만 두라.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멈추어라.
당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아무에게도 지우지 말라.
그 책임을 떠맡아라!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비판했던

그 모든 것을 포옹하고,
경멸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당신의 모든 환영을 따라 살아보고,
당신의 모든 꿈을 추구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다른 이들이
그들 자신의 배움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고 연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경험한 가치를 누리도록 허용할 수 있다.
그 때 당신은 성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하며 당신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삶에서 벗어나
절제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동굴이나 사원에 은둔하여 향을 피우거나,
높은 산의 정상에 앉아 ‘하느님의 경지’를 숙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자체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고 그 삶을 궁극까지 경험해 봄으로써
당신은 성자가 된다.

그리하여 지혜의 덕으로
마침내 온 인류를 포옹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이 되는 유일한 길은
완전하게 삶을 살고 포용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다 겪어 보고,
모든 감성을 다 느껴보고,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그 안에 모든 삶의 지혜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왕이 되기 전까지는

왕이 겪는 일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왕은 하인이 되어 보기 전까지는
그 하인의 비천한 신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본처는 애첩이 되어 보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애첩은 본처가 되어 보지 않고는
그녀의 비난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결한 삶의 길은
모든 것을 다 감싸 안는 것이다.

매춘부와 성자,
스승과 농부,
살인자와 피살자.
정복자와 피정복자,
자식과 부모 -
인간의 모험으로 창조된 모든 인물,
모든 상황을 다 포함한다.

알다시피,

당신은 당신이 받아들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
남들을 비난한다.

만약에 당신이 모든 상황을 다 겪어보고,
그 상황에 대해 편안해지면,
그 때에는 아무런 비판 없이,
모든 이를 이해하고,
그들 모습 그대로를 허용하는 것이 쉬워진다.

당신이 그들이었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을 비판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사랑의 심연이
당신의 영혼 안에 자리 잡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에 단신은 진정한 그리스도가 된다.
왜냐하면 장신은 제한 된 삶을 사는
당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그 전체로 사랑하고,

하느님 전체가 되는 것은
그 의 존재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존재 전부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모든 형제들이다.

당신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투쟁,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다 살아 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때 당신은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뛰쳐나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들을 홀로 놔두고
그들 자신의 필요와 계획에 따라
진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뜻이다.

그들의 운명이
전쟁영웅이 되거나
성직자가 되거나,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이 되는 것이나

그것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아버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가 굶주리거나
불구이거나,
농부이거나
왕일지라도,
그것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경험을 선택하였다.

그것에서 배우고 채워졌을 때에만,
그는 다른 경험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는
더 고매한 이해를 계속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되고 나면,
당신은 암흑과 진흙탕 같은
제한된 의식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당신의 전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복닥거리는 무리들을 이해하고
왜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당신도 한 때 그러한 길을 걸은것 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제한적인 삶을 사는 자유를 허용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당신은 그들이 제한적인 삶을 살아보아야만,
무한한 이해를 얻게 되고,
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낯선 이를 만날 때,
그의 피부색,
말쑥함이나 용모에 상관없이,
당신은 그를 쳐다보면서
그의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이들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당신도 하느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게 된다.

러면 당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서 하느님이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이 지상으로부터 많은 ‘안식처’가 있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오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 문들은,
자신과 주변의 모든 생명 안에 살아 있는
하느님을 온전히 포옹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닫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하느님 모습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에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에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을
당신이 알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의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은
판단에 따라서 지배당하지도 억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그리스도 ((하느님으로 살아가는 인간))
자기 존재 안에 거하는 방식이다.


이 삶에서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인가?


항상 당신의 느낌을 따르는 것이다.
영혼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 경험하도록 강권하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귀를 기울인다면,
무엇을 경험 할 필요가 있는지
당신의 영혼은 말 해 줄 것이다.

지루함을 느끼든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이미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 모험에서 지혜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기 원한다면,
영혼에서 느끼는 그러한 충동은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의 값진 결과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기 원한다면,
영혼에서 느끼는
그러한 충동은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회피한다면,
다음 기회 혹은
다음 생까지 그 경험을 뒤로 미루는 것일 뿐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바에 따라

진실하게 살며,
그것을 느끼고
자신을 사랑하라.

그 느낌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경험이 있고,
당신의 삶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줄 장엄한 모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느낌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의 아름다운 자아가
심원한 지혜를 터득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당신은 항상 올바른 일을 할 것이다.

느낌에 거슬러 가고 있을 때,
당신은 몸이 병들고,
신경증에 걸리거나
절망에 빠지게 된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고,
꿈을 따르고,
욕구를 따라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혼이 당신에게 시키는 일을 하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혼이 당신에게 시키는 일을 하라.

그리고 그것을 끝마칠 수 있도록 허용하라.
그러고 나면,
당신은 또 다른 모험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당신은 결코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이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자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경험을 얻기 위해서.

언젠가 그 시간이 올 것이다.

이 생에서나 아니면,
그 다음 생에서,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 욕구가 없고,
오직 ‘존재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매춘부나
도둑,
살인자, 또는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를 저주하고,
그들이 한 일을 가지고 비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이었고,
그들이 가고 있는 그 길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경험으로 인하여 그만큼 완전하며,
당신이 이곳으로 되돌아와 경험해야 될 것은 더 이상 없다.
그 때 당신은 더 위대한 존재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맞게 될
새로운 모험을 향해 이곳을 떠나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준 내용을 숙고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전능한 하느님이자,
불꽃이며,
생명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인지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맞닥뜨리게 될
온갖 모험에서 당신 자신이라는
미스터리를 더 잘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현재 그대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갈고 닦아,
당신 존재의 빛이
당신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위대한 라 와 견줄 만하며,
당신 존재의 평화로움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깊은 밤의 고요와 견줄 만하게 될 것이다.

결코 당신 자신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결코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이 되고자 하는 대로 허용할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때,

우아함과 기품, 그리고
유순한 강인함을 지닌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거룩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현재의 나를 지극히 사랑합니다.
유아독존인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신은 생명의 흐름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은 이 지상을 거닐고 있는 마스터이다.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그리스도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당신이 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고 포옹하며
그 모든 것은 당신 삶의 행복을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오늘 현재의 당신이라는 숭고한 실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대한 가르침을

그에 맞는 방식으로 당신들에게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이 당신을
카르나나 죄악, 심판, 인과응보로부터 ‘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긍정도 없고 부정도 없다.
하느님은 그저 있음 그 자체다.

그러한 있음이 모든 인간,
모든 행동,
모든 생각,
모든 감성을 품는다.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이 당신을 심판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그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과 그가 하나이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라고 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항상 당신에게 주어져 있었다.

아무리 당신의 경험이 비천하다고 해도
여전히 태양은 솟아올라 하늘을 누비며 넘실댄다.

변함없이 계절은 돌아오고,
들새는 북쪽 하늘을 향해 날며,
당신 방의 덧문을 닫을 때까지
쏙독새는 아직도 울고 있다.

당신은 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것들을 지속하게 한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당신은 생명이 당신에게 언제나 베풀고
관용과 영원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밝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떠나라.


당신이 지고 있던 짐은 이제 내려졌다.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
항상 그래 왔다는 것을 알라.

당신은 사악하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라.
하느님이 당신의 삶에 함께 하기를 기원하라.
그는 항상 거기에 있어 왔으므로 당신 사랑을 숙고하고 있을 때마다,
나를 떠올려 보라.
어디에선가 미풍이 불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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